신파가 땡기는 계절.. 재벌가 혼외자식으로 태어나서 어린시절엔 정체 모르고 홀어머니 밑에서 크느라 방학이면 외할머니댁에 맡겨지던 김신, 알음알음 동네사정 다 뻔히 알고사는 조그만 어촌마을에서 왕여 만나줘..버스타고 이십분은 나가야하는 학교 다니고 있는 왕여 친구가 하나도 없던 왕여.
어렵게는 살아도 자식 기죽이고 싶진 않아서 늘 좋은 옷, 신발 사 입혔어. 땡볕에 까맣게 그을린 바닷가 또래들, 다 늘어진 셔츠에 헤진 옷차림으로 뛰어놀다 김신 보면 멈칫거리며 모두들 낯설어 했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다가가지 못하던 김신과 유일하게 닿았던 건 유독 하얗고 조용하던 왕여.
손자가 심심할까 집에 있던 낡은 자전거 읍내까지 끌고 나가 기름칠 새로 싹 해온 거 타고 바닷가 따라 나 있는 길 자전거 타고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방파제 근처에 혼자 앉아있던 왕여랑 처음 마주했던 여름. 코 끝에 들러붙던 바다 비린내가 익숙해질 때쯤 만나게 된. 그냥 김신을 빤히 보던 눈.
조그만 마을에 입에 오르 내릴 일이 뭐 많다고. 그래도 게 중 으뜸인 건 신내림을 받았다던 윤씨 이야기. 아들이 하나 있다는데, 그 아도 이상하다더라... 꼭 귀신 붙은 것 마냥 음침하다 하니 가까이 하지 마라. 할머니가 지나가는 소리로 신신당부하던 '그 아'가 저 애라는 걸 알 것 같았지. 할머니
말은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이 말 잘 듣던 열 두살 손자가 처음으로 그걸 어기던 순간. 찌그러진 자전거 바구니에 담아뒀던 테트리스 오락기와, 읍내에서 사온 과자 한 봉지와 미지근해진 음료. 자전거 세워두고 그거 몽땅 가지고 왕여 옆으로 가서 앉았어. 그리고 별 말 없이 먹을 거 내려두고 오락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실은 정신은 온통 옆에 쏠렸지. 자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시선 느껴져서. 마침 건전지가 없던지 깜빡이다 전원이 나가버린 오락기를 조금 짜증스럽게 내려두고 어떻게 할지 망설이는데 하얀 손이 숙이고 있던 제 앞으로 쑥 튀어나와. ...안녕? 어, 응... 안녕... 손은 잡지
도 못하고 눈은 마주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대답을 한 게 둘의 처음 시작. 한 달하고도 열흘은 더 이곳에서 혼자 뭐하고 지내나... 할머니댁 마당 평상에 누워 쏟아질듯 박혀있는 별 보며 어젯밤에 눈물을 살짝 훔쳤던 기억은 고새 잊혀졌지. 고개 들어 옆을 보니 저를 보고 있는 얼굴. 아, 웃었다...
그 날 부터 아침에 눈 뜨면 할머니가 새벽같이 차려두고 나간 밥 깨끗히 비우고 마을 가장 안 쪽 파란 슬레이트 지붕 집 낡은 담벼락 앞을 서성이는 게 김신의 일과. 자전거 뒤에 왕여 태우고 길게 그물 널려있는 선착장 지나 또 한참을 가면 방파제 끝에 등대. 등대 그늘 아래에 앉아 오락기며 가져온
과자, 수십번을 읽어 너덜해진 만화책들,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물...그거 던져두고 그 아래에서 둘이 신나게 놀았지. 서울 학교 얘기, 방학이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걱정된 엄마가 이리로 저를 보냈단 얘기, 나는 반장을 하고 있고 좋아하는 건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
이제 네 얘기도 들려줘. 하고 아빠다리 하고 왕여 가까이 앉으면 왕여 그냥 웃어.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하고. 김신 입술 삐죽이면서 그런게 어딨어 한다. 내가 무서운 건 방학숙제 밖에 없어. 하면서 시선 돌려 잔잔한 바다나 보고 있노라면 네 얘기 더 들려줘... 그게 더 재밌어, 하는 왕여.
학교 입학하자 마자 이리로 전학온 것도 모시는 신의 뜻이라는 엄마 때문인데, 간판 하나 안 걸어도 용하다 물어물어 찾아오는 사람들 덕에 먹고 살 걱정까진 안해도 되는데 왕여를 향한 또래의 원색적인 비난과 시선은 어떻게 할 수 없었음. 게다가 아무리 밖에 있어도 살결이 타지 않으니, 귀신들린
왕여, 사람 잡아 먹는 왕여, 저승사자 왕여...온갖 별명 다 붙었지. 가뜩이나 조그만 읍내의 분교라 그거 모르는 이 없다보니 같이 앉으려는 이도 없어 늘 짝꿍없이 혼자. 혼자인게 익숙해진 어린 왕여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왕여. 내가 정말 괜찮아? 왕여의 질문에 김신 속으로만 대답한다. 응, 예뻐.
늘 혼자인게 익숙하던 왕여 이제 방학만 기다리게 됨. 방학이면 김신이 오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더 간절하게 방학되길 기다리고... 달력에 자그맣게 엑스자 그어가면서. 그렇게 겨울방학, 다음해 여름방학, 중학교 가기전 마지막 겨울방학. 김신 올 때면 읍내까지 나가야 사먹을 수 있는 자잘한 불
량식품 실내화주머니 미어터지게 담아와서 나 다시 올 때 까지 이거 먹구 있어. 하면 왕여 또 암말없이 웃고 말아. 그거 웃는 거 좋아서. 시골 내려올 때면 가방 몇개씩 들쳐 메고 왕여가 좋아할 만한거 관심있는 거 다 들구서 내려오겠지. 그렇게 중학교 가고 더 큰 학교로 가게 되면서 왕여 괴롭히거
나 놀리는 애들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특히 같은동네라 국민학교 다닐적 부터 더 자주 보고 알았던 녀석들은 왕여를 더 심하게 괴롭혔으면...왕여가 친구도 하나도 없고 늘 혼자 있는데 언젠간 부터 방학이면 서울서 내려온 그 이상하게 밥맛인 자식하고 딱 붙어서 죽고 못살게 군다는것도 알고 있고.
너 걔 이거냐? 새끼손가락 펴서 까닥까닥 흔들어 보이면 왕여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왕여 손목 붙들어 잡아 멈춰 세우면서 욕도 하면서 험악하게 굴겠지. 너 그 새끼한테 뭐 해주는데? 어? 왕여 잡힌 팔목 아파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 그럼 질렸단 표정으로 왕여 밀쳐
내고. 그거 일상이라 왕여 아무렇지 않아. 하나 아쉬운 건 이럴때면 김신이 보고 싶어. 옛날엔 버틸 수 있었는데. 괜찮았는데 지금은 김신 얼굴 생각나. 지금보다 훨씬 앳된 김신 사진. 무뚝뚝하게 정면보고 찍혀있는. 김신이 보고싶을 때 보라고 내준 그거 몰래 꺼내 보면서 생각해. 빨리 보고싶다고.
김신 할머니도 그렇겠지만 왕여 엄마도 김신 내켜하지 않았으면. 집 밖으로 걸음 옮기는 일 드문 양반이니 김신을 본 적도, 누군지도 모르면서 늘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씩해. 걔는 안 돼...단호하고 서릿발 같은 음성에 대꾸 없으면 혀 차는 소리 들린다. 내 새끼지만 어찌 저리 팔자가 기구할꼬.
사춘기 지나면서 부터 왕여 약간 다른 의미로 눈에 띄게 되는데 좀 외적인 모습 때문이었으면. 평소처럼 괴롭히고 못되게 굴던 애들도 좀 멈칫할 정도로. 진짜 꼭 뭐에 쓰인 것처럼 눈에 차는 예쁨이어서 뭔가 함부로 다가가지 못해야 한다. 꼭 색기가 막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김신은 중학교 가면서 부터 할머니댁에서 머무는 날이 조금씩 줄어. 방학 내내 있다가... 이젠 일주일쯤 일찍 올라가고... 그러다가 이제 한 달... 그 다음은 한 삼주쯤... 김신 고등학교 올라갈 쯔음해서 김신 아버지가 김신을 아들로 인정하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받아놔서. 왕여 볼 수 있는 날들이
조금씩 줄어드는 거 알지만 서운한 티 못 내겠지. 김신이랑 자기 사이가 어떤건지 알고 있으니까. 이대로 여기서 서로 인사도 없이 끊어낸대도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하고 말. 왜, 집에 가기 싫어? 그래서 그 때 부터 왕여 집에도 해 다져서 깜깜해 질 때 까지 들어가기 싫어하고 아무것도 안해도 그냥
같이 있자고 조르듯 굴었으면 좋겠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김신은 그런 왕여 변화가 좋았으면. 좋아도 싫어도 자기 감정 티 안내고 그냥 웃기만 하던 왕연데. 집 앞에 데려다 주면 잡은 손에 힘주고 손바닥 만지작 거리기만 해서 김신 그거 내심 흐뭇해줘. -왜, 들어가기 싫어? 나 가지 말까? -....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숙여 왕여 얼굴 쳐다보면 손 슬쩍 빼내면서 가아. 하고 밀어내는 왕여 귀여워서 김신 왕여 안아서 등 다독여주겠지. 옛날엔 훨씬 더 왕여가 어른스러웠던 거 같은데. 이제는 꼭 제가 형인 것 같고. 투정부리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게 뿌듯해서. 김신 보내고 들어오면 마당
에 서 있던 윤씨 혀 차면서 고개 저을듯. 중얼중얼 거리면서 기도하는데 왕여 아랫입술 깨물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내일 김신 서울로 떠나는 날이야. 여기온 지 이제 일주일 밖에 안됐는데 올라가야 한대. 다음 방학 때는 이보다 더 적게 머무르다 갈수도 있고, 어쩌면 못 올 수도 있대. 그 얘기 하
면서 자기 눈치 보는 것도 싫었어. 김신은 자기한테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다 얘기해줬으니까. 이름 대면 저도 아는 그런..거기 제일 높으신분 아들이라니까. 자기도 몰랐는데 얼마전에 알았다면서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고 심난한 얼굴도 했었으니까. 근데 자기는 어머니가 하란대로 할거라니까.
다음 날 일찍부터 집 담벼락에 붙어서 저 기다리고 있던 김신 알면서도 부러 나가지 않았던 건 왜 꼭 다음이 없을 거 같아서인지. 만나고 헤어지고 지금껏 수십번을 했는데, 단 한 번도 그런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그런 마음이 들어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다가 혹시나 그대로 가버릴까 덜컥 겁도 들어
대문 밖에 뛰쳐 나가니, 꼭 제 마음같이 우중충한 하늘이 곧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데 김신은 인기척에 왕여 맞이하며 환하게 웃더니 손 붙잡고 뛰어, 한다. 그대로 손 붙들려 밭 지나쳐 생선 가득 말려둔 것 지나쳐, 엉킨 그물들 지나쳐 쉬지도 않고 한참을 달려 방파제 제일 끝, 등대 앞까지 왔어.
칠 벗겨진 등대 옆에 서서 숨 몰아 쉬는 제 양 손 붙들고 마주 섰는데 왕여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 안 살 깨물면서 그거 참겠지. 언제부터 비가 왔을까. 둘 다 온통 젖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김신 왕여 보면서 머뭇거리다가 말해. -나 이제 못 와... -.... -이제.
못 와...이제...똑같은 말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렇게 얘기하는데 비는 계속 거세지지. 결국 옷벗어서 왕여 덮어준다음에 망설이다가 등대 아래 쇠문 잡아 당겨 좁은 공간 안에 둘이 들어가. 걸쳐줬던 옷 바닥에 깔아 왕여 앉히구 자기도 그 옆에 앉아. 좁지만 비를 피할 수 있어서 가끔 몰래 왔던.
등대 안에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왕여 얼굴은 계속 젖어 들어갈거야. 우느라 계속 젖는 얼굴 손바닥으로 살살 닦아주니까 왕여 서러워서 소리내서 운다. 이번에도 가면 안된다는 걸 몰래 일단 왔어. 할머니께도 인사 드려야 하고... 아니 할머니도 곧 서울로 오실거니까. 사실은 왕여, 왕여 때문에.
-좋아해. -..... -정말 많이... 알지? 김신이 그렇게 말하면 눈물 때문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고개 세차게 끄덕인다. -다시 꼭 데리러 올게. -.... -기다려 줄 수 있지? 하는 물음엔 고개 저어. 김신 얼굴 굳힌다, 왜... -그런 약속은 하지마.... 왕여 울먹이면 김신이 왕여 뺨 끌어다가 따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