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발. 애가 훌쩍거리면서 고맙다고 하는데 순간 열이 확 받는 거. 일부러 이랬나? 이런 생각도 들어. 고작 19살인데 영악하게 군다 싶지. 이민역 제 손 잡고 있는 유기연 털어내곤 방문 쾅 닫고 들어간다.
유기연은 형한테 너무 고마운데 형 기분 안 좋아 보여서 형한테 너무 미안하고 그래. 사실 유기연도 이민역한테 데려다 달라고 한 거, 이민역 보이길래 홧김에 얘기한 거다. 얘는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정말로... 이민역 입에서 데려다준다는 말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절할 줄 알았음. 아저씨한테 듣기로는 너무 바빠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고, 그래서 이민역 때문에 불편할 일은 크게 없을 거라고 했어서.
유기연 엄마가 말한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소파에 앉아있어. 형도 9시 출근이고 늦어도 여기서 8시에는 나가야 되지 않겠냐는 잔소리도 들었고, 형이 몇 시에 나올지 모르니까 무작정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 거.
안 그래도 기분 나빠 보였는데 자기가 늦어서 형 더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가 않은 거야. 7시 40분쯤에 이민역 자켓들고 나오는데 소파에 샛노란 교복 입고 앉아있는 유기연 보고 놀란다. 이민혁 한 마디도 안 하고 집 나서는데 유기연은 뭐가 좋은지 헤헤 웃으면서 따라오는 거임.
이민역 뒤 졸졸 따라가면서 자꾸 웃어.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 조수석 탑승함. 이민역 이제는 화나는 거보다 유기연 골 때리는 거야. 유기연 천성이 이런가 싶고. 자기 신세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이민역 운전하면 아무것도 안 듣는데 차 출발하자마자 유기연 바로 노래 틀어도 되냐고 물어온다. 생각해 보니 말 놓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유기연 이민역한테 반말부터 하지. 이민역 앞만 보면서 어. 딱 한마디 하고 말아. 유기연 기다렸다는 듯이 블루투스 연결하고 노래 틀잖아.
여자 아이돌 노래라도 나오나 싶은데 의외로 재즈랑 뉴에이지 흘러나옴. 옆에서는 노래 흥얼거리고 있고... 음악 한다고만 들었지 정확하게 뭐 하는지는 모르고. 몰라도 뭐, 상관있나?
그렇게 학교 데려다주고 학원에서 픽업해오고 그런 거 이민역이 계속했는데, 어느날은 이민역도 너무 피곤한 거임. 안 그래도 회사는 스타트업이고 새로운 프로젝트 들어가서 바쁘기도 더럽게 바빠. 평소 같으면 회사에서 자고 그러면 되는데 지금은 애가 있으니까 그럴 수가 없잖아.
회사에서 자도 유기연 학교 갈 시간 맞춰서 집 가고 그랬었음. 유기연 학교 내려다 주고 다시 회사 가고,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유기연 학원 마칠 시간 되면 데리러 가. 집에 유기연 내려다 주고 자기는 다시 또 회사 가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좋은 아들인 척하는 거도 힘들지.
그래도 은근하게 의지하는 아버지랑 자기가 영 불편해 보이는 새엄마,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고집 센 동생... 이런 게 한 번에 몰려드니까 자기 혼자 이러고 말자 하는데 너무 피곤한 거. 그래서 오늘은 기연이한테 못 간다고 말을 해야 되는데 기연이 번호를 모르는 거야.
한 달 넘게 데려다주고 한 거 같은데 번호를 모르고... 회의 멈추고 애 데리러 갈 수도 없고. 직원들 다 너무 피곤해하니까 회의는 잠깐 멈춘다. 이민역 바로 아버지한테 문자해. 기연이 번호 좀 알려주세요. 하고 문자 보내면 기연이 번호 바로 오잖아. 그 번호 유기연으로 저장하고 바로 문자함.
이민역인데, 오늘 못 가 혼자 갈 수 있어? 쓰고 보내기 전에 애가 몇 번 버스를 타야 되더라 생각하게 되는 거. 뭔 씹,, 열아홉 살짜리를 뭘 이렇게 걱정하고 있고. 그래도 이민역 혼자 갈 수 있어? 지우고 이민역인데, 학원 마치면 전화해. 이거만 보냄.
유기연 혼자 연습하고 있다가 폰 울려서 본다. 형이 이렇게 연락한 적 처음이라 형 무슨 일 있나 싶기도 하고. 최근에 형 너무 바빠 보였잖아. 나 학원 마쳤어. 보내면 이민역한테서 바로 전화 옴. "기연아." 전화라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유기연 고개 꾸닥꾸닥하고 있음.
"형이 오늘 데리러 못 가거든." "응." "어떡할래. 혼자 갈 수 있어, 너?" 대답 없는 유기연에 이민역 머리 한번 쓸어넘긴다. 요즘 길 찾기 잘 나와서 걱정 없다 하지만 시간도 시간이고 무엇보다 유기연 엄마가 흘리듯 얘기한 게 신경 쓰이긴 함.
기연이가 버스 타고 집 오다가 졸아서 밤늦게 버스 종점 가서 애 데려온 적이 많은데 민역이가 픽업해 줘서 너무 다행이라고. 열아홉. 얼마나 어린 거지. 이민역은 가늠이 안 되는 거야.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그냥 지 눈에는 너무 어리니까.
손가락으로 책상 툭툭 치던 이민역 결국 타협하는 거. 그게 뭐냐면 집보다는 가까운 자기 회사로 불러서 거기서 둘이 같이 집에 가는 거. 그렇게 하는 걸로. "학원 앞에 버스정류장 있지." "응." "거기서 46번 타면 형 회사 앞에서 내리거든." "46번?"
"어, 너 어차피 집에 늦게 들어가도 상관없잖아." "움... 버스 내리면 전화할게." 좀 얼떨떨해서, 유기연 끊어진 전화에 폰 화면만 멍하니 보고 있음. 집에 혼자 가도 되는데. 그러면서도 유기연 연습실에 펼쳐진 자기 짐 거의 쓸어 담듯이 하고는 학원 나간다.
이민역 회사는 유기연 학원에서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음. 밤이라 버스가 쌩쌩 달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유기연의 마음이 들뜬 건지 아니면 정말 물리적으로 거리가 짧은 건지. 유기연은 어차피 그런 건 다 모르겠지만.
유기연 버스 내려서 이민역한테 전화하려는데 저 멀리서 이민역 전화하면서 담배 피우고 있는 거 보이잖아. 유기연 이민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민역 너무 빡쳐보이는 거임. 형 저런 모습 처음 봐...
유기연이 보던 이민역 항상 깔끔하고 정중한 그런 모습이었고, 되게 무던해 보였잖아. 부모님한테도 그랬었고, 이민역은 유기연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었거든. 머리도 잔뜩 흐트러지고 옷도 평소에 보던 것들도 아니라서 형이 조금은 낯설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민역 유기연 기척 느꼈는지 슬쩍 쳐다보곤 담배 끈다. 전화 귀에서 살짝 떼곤 유기연 쳐다보면서 입모양으로 그러는 거야. 기다려. 유기연 또 고개 꾸닥꾸닥. 이민역 통화 끝날 때까지 자기 손톱이나 보고 있다.
이민역 따라 엘베 타는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는 거야. 한 발짝 물러서서 이민역 뒤 졸졸 따라서 회사 들어간다. 인테리어가 어떻고 회사 분위기가 어떻고 그런 거는 하나도 모르겠고 유기연 바닥 아니면 이민역 등에 시선 고정하고 걷잖아.
이민역 좀 걷다가 대뜸 어디 문을 열어. 그럼 직원들 피곤한 표정으로 모여있지. "10분 후에 회의할게요." 유기연 이민역 뒤에만 있다가 직원들 궁금해서 빼꼼 고개만 내미는데 그 순간에 직원들이랑 바로 눈 마주치지. 놀래서 다시 이민역 등 뒤로 숨는데 직원들은 난리가 났잖아.
"누구예요?? 와, 완전 애." "몰라도 돼." 이민역 문 닫으면서 그러면 안에서 대표님 가차없다고 하는 소리 들리잖아. 유기연은 풀 죽었고. 이민역 대표실 들어가서 문 닫으면 유기연 대뜸 그러지. "왜..?" "뭐를." "왜 몰라도 돼?" 표정을 못 숨겨서 서운한 거 다 보이잖아.
이민역 그런 거 다 보고 있으면서도 애한테 져주는 거 없지. 그냥 애 기분 풀라고 좋게 말해줘도 되는 건데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애 기분이 어떻든 신경도 안 쓰잖아. "말할 필요가 있나? 여기서 기다려."
애 집에 혼자 보내는 건 그렇게 걱정했으면서 막상 눈앞에 있는 애 달래주는 건 나 몰라라 하는 거. "응..." 대표실에 유기연 혼자 두고 나온 이민역, 회의실 들어가기 전에 대표실 한 번 힐끔 본다. 자기도 웃기잖아. 이럴 거면 달래주던가.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또, 시발.
유기연 혼자 덩그러니 낯선 곳에 남겨졌잖아. 자기가 괜히 여기서 노래라도 틀면 일하는 사람들 방해될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해. 자기 가방 지퍼 여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거에도 화들짝 놀라고. 유기연 이럴 거면 혼자 집 간다고 할 걸 후회 조금 한다.
사실 집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면서 이민역에 대한 작은 오기 이런 거야. 그래도 형은 아무렇지도 않겠지? 유기연은 지금 이민역한테 서운한 게 제일 커. 동생이라고 해주면 안 되나. 난 형이라고 친구들한테 다 얘기했는데. 여기 혼자 두고 간 것도 서운해.
일하는 거고... 그런 거 다 알지만 한 번 터진 건 모든 걸 다 서운하게 만들지. 형이랑 조금은 친해진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인가 봐...
이민역 회의 끝내고 직원들 퇴근 시키고 대표실 들어오면, 유기연 소파에 앉아서 불편하게 자는 거나 보인다. 애 자는데 깨우기도 그렇고 시간이 엄청 늦은 것도 아니라 그런 유기연 내버려 두고 이민역은 또 일하기 시작하지.
유기연 엄청 깊게 잠든 것도 아니었고 자면서도 회사라는 생각이 드니 눈이 확 뜨이는 거. 파드득 일어나서 주위 둘러보면 이민역 일하고 있는 거 눈에 보이지. 아, 형 있구나. 잠 덜 깨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이민역 자리 정리하고 가방 들고 일어나잖아.
가자는 말 한마디도 안 하고 유기연 나올 때까지 대표실 문이나 잡아주고 있어. 유기연 가방 들고 허겁지겁 대표실 나간다. 사무실 불 다 꺼져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 보고 이민역이 자기 기다렸나? 싶은 거야. 유기연 언제 기죽었냐는 듯이 이민역 올려다보지.
"형 왜 나 안 깨웠어?" "잘 자길래." 이 한 마디로 이민역한테 서운한 거 다 날아갔잖아. 동생이라고 소개 안 한 것도 회사 대표니까, 이러고 말아. 기분 좋아진 유기연은 이민역 차 타자마자 자기 폰이랑 블루투스 연결되어 있는 거 확인하고는 노래 튼다.
이민역 차에서는 여전히 재즈가 흐르고, 조수석은 항상 누군가 앉아있고. 유기연은 익숙하지만 이민역한테는 이게 낯설다는 거.
둘이 불 다 꺼진 집으로 들어가면 이민역은 곧장 자기 방으로 향한다. 유기연은 거실 불 켜다가 이민역 옷자락 잡아채지. "형, 나는... 형이랑 가족이 되어서 좋아..." 이딴 말을 다 하고.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가는 유기연 귀가 조금 빨개졌나. 그냥 웃기잖아.
기가 죽어서 누가 봐도 서운하다는 티 팍팍 내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저딴 말을 한다는 게. 좀 재밌어. 고등학생들은 다 저런 가. 자기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관심도 없는 애새끼 보호자 노릇 하는 것도 힘들어 뒤지겠는데 애가 종종 저렇게 귀염을 떠니까...
평소처럼 유기연 태우고 학교로 가던 도중이었음. 유기연은 이민역이 운전할 때 거의 말을 안 거는 편이었는데 애가 하루아침에 뭘 잘못 먹었는지 자꾸 말을 거는 거야. "형 많이 바빠?" "어." "그럼 오늘 집에 못 와?"
자꾸 그러는 게 이민역 슬슬 짜증 나지. 혼자 있으면 노래도 안 듣는데 유기연 때문에 달라진 게 얼마나 많은지 아냐고. 노래가 이민역의 마지노선이었잖아. 이민역 대답도 잘 안 하다가 애가 계속 그러니까 왜. 딱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말아.
유기연은 이민역 점점 기분 안 좋아지는 거 보이니까 눈치 보다가 별다른 말 못 하지. 이민역은 애가 왜 이러나 싶어. 어제까지만 해도 혼자서 노래 틀어놓고 흥얼거리면서 가던 애가. 결국 그 뒤로 둘이 한 마디도 안 하고 학교 도착한다.
근데 애가 학교 도착해도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가방끈만 자꾸 만지고 안절부절 하는 것 같은 거. 그게 유기연한테 딱히 관심이 없는 자기가 보기에도 애가 이상한 게 딱 보여. 한 마디 하려다가 순간적으로 이민역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거.
돈이구나. 이민역은 애가 돈이 필요한데 부모님한테 말을 못 한 거구나. 이렇게 생각해. 이민역 그게 뭐 어렵나 싶고 그렇지. 바로 자기 지갑에서 현금 꺼내서 애한테 쥐여준다. "필요하면 말을 해. 답답하게 돌려 말하지 말고." "어... 응, 형 고마워..."
유기연 이민역이 준 현금 들고 차에서 내리지. 손에 돈 쥐고 학교 들어가는 꼴이 자기 눈에만 이상해 보이는 건지. 애 교문 넘어서는 거까지 보고 차 돌린다.
사실 이날 이민역 아빠 생일이었음. 이민역은 바빠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지. 유기연은 이민역 기분 안 좋아 보여서 눈치 보다가 말 못 한 거고. 그러다 차에서 내릴 때 이민역이 돈 쥐여주길래 유기연은 이민역이 아빠 선물이든 뭐든 사라고 준 줄 알잖아.
학교 가서도 그 돈 잃어버릴까 봐 주머니에 잘 들어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지. 형이랑 같이 아빠 생일을 준비한다는 게 얘한테는 너무 특별하고 그래. 유기연은 점심시간 즈음에 이민역한테 문자하지. 형 나 오늘 학원 좀 빨리 마쳐.
그러고 이민역한테 알려준 시간 보다 더 빨리 나와서 맛있다고 소문난 곳 케익 하나 사잖아. 이민역한테 받은 돈으로 산 거긴 한데 그래도 뿌듯하지. 생전 처음 있는 아빠의 생일이잖아. 유기연한테는 이 처음이 누구보다 소중하단 말임.
유기연 빨리 마친다 해서 일하다가 나온 이민역만 의문임. 자기보다 빨리 나와서 자기 기다리던 애가 아닌데 이미 밖에 나와있고, 손에는 케익이 들려있고. 조수석 올라타자마자 노래부터 고르고 있는 애한테 묻지. 생일이면 아침에 있었던 그 모든 게 이해가 간다.
"너 생일이야?" 유기연 노래 고르다 말고 엄청 당황해서 이민역 보지. 눈동자 흔들리는 거 이민역 눈에도 다 보인다. "아빠... 생신이잖아..." 아.
이민역 아무말도 없이 입술만 쓸어. 그러면 유기연 또 형 눈치 보다가 그러지. "형이 돈 준 거, 아빠 케익 사라고 준 줄 알고...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유기연 괜히 케익만 쳐다봐. 아침에 그냥 말할걸. 알고 있냐고 물어나 볼걸. 애는 또 후회하기 시작하지.
"그래서 아침에 그렇게 말 걸었어? 이거 말하려고?" 사실 이민역은 이런 거에 아무 생각이 없고, 이렇게 말한 것도 그냥 생각이 나서 말한 건데 유기연은 그 말 듣고 또 풀이 죽어. 그리고 이민역은 그제서야 훅 와닿지. 유기연이 진짜 가족이구나 하는 거를.
이때까지 애한테 관심도 없고 아는 거라고는 학교랑 이름 전화번호, 나이, 학원 어디 다니는지 그런 거니까 별로 가족 같지도 않았단 말이야. 이민역은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유기연이랑 가족이 된다는 거 자체가 그렇게 끌리지는 않아. 애가 자기한테 귀염을 떠는 거랑은 다르잖아.
아, 별론데.
이민역이 말없이 운전하면 유기연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야. 갈수록 형 눈치만 보게 되는 것 같지.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형이랑 잘 지내고 싶은데 맘처럼 쉽지가 않아. 형 바쁘니까 잊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냥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다 후회스러운 거.
이때까지 혼자 살아서 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려워. 심지어 나이도 훨씬 많은데. 집 들어가는 내내 아무 말도 없잖아. 차에서 축 처졌어도 유기연 집 들어가는 순간은 얼굴 펴고 밝게 인사한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다녀왔습니다."
인사하면 엄마가 저녁 상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잖아. 가운데 빈 곳에 케익 상자 올려놓으면, 이제는 유기연의 아빠가 된 이민역의 아버지가 기연이를 안아줘. 이렇게 귀여운 아들이 생겨서 기쁘다. 고마워, 아들. 유기연 마냥 울고 싶잖아. 귓가에 아들이라는 단어만 맴도는 것 같아.
울컥 올라오려는 거 나름대로 싹 숨기고 배시시 웃으면 유기연 아빠도 기연이 보고 웃어줘. 그리고 한 발짝 뒤에서 그걸 지켜보는 이민역이있다.
"생신 축하드려요. 저는 미처 선물을 준비를 못 했는데." 이민역 뒷말은 안 해도 괜찮은데 자기랑 있을 때 그렇게 안절부절 하던 애가 생각이 나서 일부러 뒷말도 붙였잖아. 그리고 당연하게 유기연은 그 말에 당황한다.
잔뜩 당황해서는 어쩔 줄도 모르고 아니라고 이 케익 형이랑 같이 고른 거라고 거짓말 치고 있지. 이민역 아버지는 그럼 딱 한마디 해. 고맙다. 원래 이랬으니까 이민역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유기연만 울상이고 안절부절. "진짠데..." 애 거의 울 것 같지. 이제 표정 숨기지도 못해.
이게 뭐라고 유기연은 자기랑 아버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유기연 입술 꼭 깨물고 있다가 밥 먹으라는 제 엄마 말소리 하나에 표정이 또 풀려. 식탁 중앙에 놓인 케익은 초에 불이 붙었고 유기연은 그거에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러.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이민역.
기연과 기연의 엄마는 사이가 좋았으나 그렇다고 싸우지 않은 것은 아님. 기연은 자기 성적에 예민했고, 기연의 엄마는 기연의 성적에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음. 그래서 생기는 문제들로 인한 가벼운 말싸움이었음. 어느 가족이나 하는 그런 다툼. 근데 그게 둘만 있을 때 이뤄지지 않은 게 문제였지.
기연이 민역과 함께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그러는 거야. "나 과외 받을래." 기연이 희망하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좀 더 연습이 필요한 상황이었음. 그런데 시간은 얼마 안 남았고 애는 속이 타니까 생각하고 생각한게 과외인 거.
"학원은 조금 그래." "과외를 해야겠어? 꼭?" "응. 이제 더 갈 수 있는 학원 없어." "음, 엄마가 생각을 좀 해볼 테니까 아들도 좀 더 생각을 해볼까?" 엄마의 이 말로 기연의 심기가 완전히 뒤틀린 거임.
엄마는 항상 자신의 성적에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까지 그러려니 하긴 했는데 고3인 이 시점에서까지 이러니 기연이 너무 속상하고 그렇잖아. "나 그럼 대학 가지 마?" 결국엔 말이 좋게 나가지 않지. 기연이 엄마는 거실에 앉아있는 이민역 아버지 눈치를 한 번 봐.
기연이는 지금 그런 거 신경 못 쓰잖아. 애 목소리 점점 커지려 하지. 기연이 엄마는 이민역도 있으니까 기연이 살살 말려. 그러다 기연이 엄마가 연습을 더 하면 안 되냐는 얘기를 꺼내게 되면 기연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알겠다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지. 기연이 엄마는 한숨 쉬며 괜히 그러잖아.
"애가 성적 욕심이 있어서." 유기연 저러는 거 처음 보잖아. 자기랑 집에 올 때는 기분 괜찮았던 것 같거든. 이민역은 그런 기연이가 새로워. 그저 애교 많은 외동아들인 줄 알았더니 저런 면도 있었구나.
기연이는 결국 받고 싶었던 과외는 못 받게 되었음. 사실 기연이의 시간도, 과외를 받을 공간도 마땅찮았기에 이게 맞는 건데 서러운 거는 또 별개잖아. 기연이도 알아. 자기 욕심인 거. 근데 원하는 목표가 있으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싶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