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역은 이러는 거 보고서야 애가 꽤 진심이구나 하는 걸 느껴. 근데 진심이고 유기연의 욕심, 뭐... 그런 것과는 별개로 애가 잠을 못 자서 아파하는 게 보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재우긴 해야겠는 거.
이민역 학교 근처에 차 세워놓고 애 좀 더 자게 내버려 두잖아. 곤히 자고 있는 애 당장 학교 가라며 깨우기도 좀 그래서 9시까지 15분 남겨놓고 나서야 유기연 깨운다. 유기연 눈도 잘 못 뜨고 미안하니 고맙니 웅얼웅얼 거리면서 차에서 내리지.
애 교문 들어가는 거 보고 가려는데 애가 길바닥에 우두커니 멈춰 선거야. 이민역 차에서 내리려는데 유기연한테 가는 친구들 보곤 별 일 있겠나 싶어서 그냥 시동 걸지.
다들 가방에서 급하게 휴지 꺼내고 손수건 꺼내는 거 보면서 대강 느낌이 오잖아. 코피 났구나. 지금은 괜찮은지 애가 친구들한테 웃어주길래 이민역 바로 차 돌려서 출근해.
애가 온몸으로 컨디션 안 좋다는 티를 내더니 사달이 났음. 이민역 밥 먹으려고 회사 나왔을 때 학교에서 전화가 오잖아. 애가 아파서 데리러 오셔야겠다. 그 얘기 듣자마자 차 키 챙겨서 애 학교로 향하지. 학교도 점심시간인지 운동장에 학생들 엄청 많고 그래.
외부인인 이민역한테 시선 다 쏠리잖아. 운동장 걸어가며 유기연한테 전화한다. "너 어디야." "나 반에..." 반이라고 하면 아냐고. 애가 몇 반인지 그걸 이민역이 어떻게 알아. 애 피아노 치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형 나... 2반. 3학년 2반." 바로 전화 끊고 3학년 2반 찾아가지.
교실 문 열고 들어가면 어디가 유기연 자리인지 바로 보여. 애들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유기연은 책상 위에 엎드려있고 주변에서는 여자애들이 괜찮냐고 묻는 게 보이지. 이민역 그 꼴 보고 짜증 확 나잖아. 아침에 데려다줄 때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사실 아침에 유기연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나.
유기연 앞으로 가서 다짜고짜 유기연 흔들어 깨우면 갑자기 나타난 어른에 학생들 다 눈 동그랗게 뜨고 이민역 쳐다보지.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싶은 거 애가 앓는 소리를 너무 내니까 그러지도 못해. 더더군다나 사람들 앞이니까. 둘이서만 있는 차 안이랑은 다르잖아.
근데 유기연 그렇게 흔들어도 일어나지도 않아. 이민역 이곳에 한시라도 머물기 싫은데 애는 묵묵부답이고 골 때리지. 이민역 책상 한 번 크게 흔들면 유기연 엎드려서 짜증 확 내잖아. "아, 시발. 좀." 친구인 줄 알고 이러는 거지.
언제 일어나려나 보려고 이민역 말없이 엎드려있는 유기연 쳐다보면 괜히 유기연 앞에 앉아있던 애가 더 쫄아. "기연아. 야, 일어나 봐야겠는데..." 유기연 친구인지 뭔지가 그러면 유기연 인상 확 찌푸리면서 일어난다. 애가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상태 안 좋아 보이지.
인상 팍 쓰고 짜증 내던 유기연 일어나자마자 보는 게 이민역이잖아. 이민역 보자마자 표정 풀리지. 이때까지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이와중에 형이 와줬다는 거도 기쁘고.
"어디 아픈데." "나 몸이 그냥..." 애가 진짜 아픈지 짧게 말하는 그 순간에 유기연 눈에서 점점 눈물 차오르는 게 보이잖아. 일단 애 데리고 나가야겠어서 유기연 책상 옆에 걸린 가방 이민역이 든다. "조퇴하자. 교무실 어딘데."
유기연 결국 조퇴증 받고 나오지. 애가 아파서 열이 오르니까 애 옆에만 있어도 후끈한 것 같은 거야. 열이 많이 나나 싶어서 대강 애 이마 한 번 짚어보고 말없이 앞장서서 걸어나가지. 이민역 평소에 걸음 빠른 편인데 유기연은 그거 맞춰서 잘 걸어왔으니 이민역은 그냥 평소처럼 걸어.
근데 옆에 있던 애가 점점 걸음이 느려지더니 걷는 소리가 안 나는 거. 이민역 뒤돌아보면 결국 주저앉은 유기연 보이지. 애가 아프니까 평소에는 잘만 따라가던 이민역 걸음 못 따라가고, 거의 뛰다시피 하니까 힘들고 숨차서 그냥 주저앉은 거야.
유기연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머리도 어지럽고. 그런데도 이민역은 애 억지로 일으켜 팔 붙잡고 끌고 가듯 한다.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유기연 찍소리도 안 하고 터덜터덜 끌려가잖아. 이민역은 애 조수석에 밀어 넣고 운전석에 앉아. 담배 한 대 태우고 싶은데 아픈 애 앞이라 참는다.
애 끌고 오고 나서 보니까 입술도 다 트고 식은땀 흘리고 상태가 영 안 좋지. 일단 병원 데려가서 수액 맞게 하는데 애가 수액 맞으면서도 끙끙거리고. 좀 자라고 커튼 쳐주고 나와서 이민역 바로 유기연 엄마한테 전화하지.
기연이 지금 아파서 병원이고, 제가 볼 테니 안 오셔도 된다고 하면 기연이 엄마도 일하는 중이라 맘대로 갈 수가 없어서 민역이한테 고맙다고 한다. 이민역 회사에다가도 일이 생겨서 오늘 못 들어가니 다들 일찍 퇴근하시라 연락 해놓지.
애 데리러 가느라 못 받았던 연락들에 답장 좀 해주고 다시 유기연 보러 들어간다. 옆에 앉아서 이메일 확인이나 하고 있는데 그런 이민역 소매 슬쩍 잡아오는 유기연 있잖아.
"형 미안해." 그렇게 말하는 애 눈가가 열 때문에 벌겋잖아. 이민역은 그냥 애 입술 툭 치고 말아. 눈도 입술도 다 벌겋네. 자기가 나가고 나서 입술을 얼마나 씹어댄 건지 그 사이에 입술이 찢어져서 피나고 그래.
애가 아파서 그러고 있는데 이민역 시선 계속 유기연 입술로 간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거. 시발, 별생각을 다 하네.
애가 수액 맞고 좀 괜찮아진 건지 아니면 더 아파서 이러는 건지 유기연 이민역 앞에서 긴장하고 눈치 보던 거 다 풀어져서 별 얘기를 다 해. 집 도착해서 주차장 돌고 있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칭얼거리지를 않나. 이민역 못 들은 척 자리만 찾고 있지.
빈 곳 겨우 찾아서 주차하는 와중에 유기연 졸음 쏟아져서 눈도 못 뜨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 얘기 꺼내는 거야. "우리 엄마는 나 아프면 항상, 자기 달라고 하고 그랬어..." 이런 헛소리도 다 하고. 이런 얘기 하는 거 처음 들어보잖아. 어지간히 아픈가 보네. "그래서."
유기연 상태 보니 얘 스스로 걸어가지도 못할 것 같지. 안아야 하나. 차 세웠는데도 안전벨트 풀 생각도 없어 보여서 벨트 풀어주려고 가까이 가는데 유기연이 그러는 거야.
"형은 아프지 마."
이민역 속이 뒤집히는 거 같아. 아픈 애 질질 끌고 그랬는데 하는 말이 이런 거라고. 병신도 이런 병신이 따로 없어. 원래 이렇게 순종적인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유기연 입술만 보는 자기도 한심하지. "혀엉..." 아, 시발.
이민역 급하게 유기연 입술 찾아. 유기연 입술이 찢어져서 나는 비릿한 피 맛이 이민역 입 안에서도 맴돌았음. 입술이 겹치고 혀가 섞이자 유기연은 우는 소리 내잖아.
그러면서 이민역 몸을 힘도 안 들어가는 손가락으로 밀어내는데 이게 진짜 밀어내는 건지, 사람 간 보는 건지. 애가 딱 봐도 경험 없고 어리숙한 게 맞긴 한데... 그래도 일부러 이러나 이런 생각도 들어. 마음껏 유기연 입속 휘저어대고 떨어지면서 얘기해.
"어떡하지, 형도 아플 것 같은데."
이러면 유기연 볼 타고 눈물 뚝뚝 떨어진다.
아픈 애 데리고 하는 게 이딴 거. 뭐에 홀렸나 싶을 정도로 충동적이었고... 그날 아무렇지도 않게 애 약 챙겨주고 했는데 방에는 오래 머물지 못했지. 그야, 또 그러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일들이 거의 없는데 왜 그랬나 자기도 후회 하긴 해.
유기연이 이걸 누구한테 말하기라도 해보라고. 생각하기도 싫다. 유기연 말고 다른 걸로 자기 욕구를 채우기는 해야겠는 거야. 그래서 이민역 친구한테 말해서 소개팅 받는다. 시간 겨우 빼서 소개팅 자리 나가면 단아하게 입은 여자가 인사해오지. 그냥 무난한 사람.
무쌍커풀의 눈매가 순해 보여서 아무 탈도 없을 것 같은 사람. 이민역 여자랑 며칠 후에 애프터 하고, 몇 번 더 만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 가지게 되고, 사귀게 되고. 안 그래도 바쁜 일정을 사는 사람인데 여자친구가 생기니 더 바빠지잖아.
이민역은 퇴근하면 여자친구 만나러 가기 바쁘지. 나이가 나이니까 빼는 것도 없어서 진도도 쉽게 나가잖아. 그러다 보니 여자 집에서 자는 날도 많아. 그러니까 이민역은 점점 유기연한테 소홀해지는 거. 애 학교 데려다주고 집으로 데려오고 하는 것도 이제 점점 손에서 놓게 된다.
여자랑 막 사귀었을 때 유기연한테만 연락했었어. 일이 바빠서 혼자 다녀야겠는데.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한참 뒤에야 답장 와. 웅 이 답장 하나를 몇 분이나 보고 있고.
유기연은 이민역한테 저렇게 연락이 왔을 때, 한참을 고민했다. 왜? 왜 하필 그러고 나서? 근데 유기연이 어떻게 할 거야. 진짜 형이 바쁜 걸 수도 있는데 형한테 따져 물을 거냐고. 그냥 웅. 이런 답장만 보낼 수밖에 없었어.
유기연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해. 이민역이랑 키스한 거도 이민역이 여자친구가 생긴 것도. 그러면서도 일말의 희망은 놓지 않고 있었음. 본인이 형이랑 가족이라는 거. 그러니까 아침에도 여전히 방에서 나올 이민역을 기다리고, 학원 앞에서 혹시나 늦게라도 올 이민역을 기다려.
유기연은 그러다가 형이 안 오면 천천히 일어나서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세상에 혼자 동떨어져서... 아무도 저를 찾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유기연은 익숙하게 버스에 올라타.
같은 가족이라도 부모님과 형제는 또 다르지. 부모님과는 다른 결로 의지가 되잖아. 그게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묶였다고 해도 말임. 유기연한테 형은 단순히 새로 생긴 가족이 아니었음.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이고, 없으면 안 되는 믿음이고,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말이야. 엄마 말고는 가족이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탔던 기연에게 민역은... 민역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고 유기연 본인이 느끼는 것보다 더 무겁고 귀중한 것이었음.
그러니까 유기연은 이런 상황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되는 거. 대학과 가족, 친구 그런 고민들 사이에 가장 큰 건 역시... 당연하게도 가족. 입시라는 19년 인생 가장 큰 도전보다 유기연한테 더 중요한 건 이 가족이었음. 입시는 재수를 해도 된다. 그렇지만 가족은...
만약 자신과 민역의 사이가 틀어져서 그런 문제로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된다면? 외가 큰집에 내려가서 재혼한 남편이 이랬니 남편한테 딸린 아들이 기연이한테 그랬다느니 재혼했는데 이혼한 건 다 이유가 있다느니 그딴 소리는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음.
그렇다고 이 고민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유기연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부모님한테 가서 형이랑 키스했다고 말할 거냐고. 절대 못 하지. 그냥 혼자만 속으로 끙끙 앓는 거임.
이민역의 아빠가 민역이가 학교에 안 데려다주냐고 슬쩍 물어봤을 때 기연은 얼마나 떨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지. 그날은 방에 들어가 연습도 못 했다. 손이 자꾸 떨리니까 피아노를 칠 수가 없는 거.
자기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가슴 한가운데에 돌이 박혀서 빠지지도 않게 딱 걸린 느낌. 밥만 먹으면 구역질하기 바빴음. 매스꺼워서 음식이 넘어가지도 않아.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나오면 힘이 없어서 손만 덜덜 떨리지. 주먹 몇 번 쥐었다 펴고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멍하니 건반 위에 손가락만 올리고 있으면 계속 보지 못했던 이민역 생각이 그렇게 나지. 뭐가 되었든, 그냥 형이 보고 싶고... 또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아. 그때 왜 그랬어? 그리고, 물어보지 못할 자신을 너무 잘 알지.
기연은 성실히도 형을 기다렸음. 바쁜 아침 시간에 오지도 않을 형을 기다리는 이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기연이도 알아. 그렇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형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그거라도 잘 하고 싶은 거지.
여전히 오지 않는 사람에 또 한 번 미련을 꾹꾹 쌓아두고 일어나.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자신과는 다르게 집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잖아.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걸어오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 - 어... 형 왔어? - 어. 학교는. - 지금 가려고. - 태워줘?
기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여. 그럼 이민역은 방향을 돌려 유기연과 같은 쪽으로 걸어가는 거. 기대도 안 했잖아.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앞장서서 걷는 이민역 걸음에 맞춰서 거의 뛰듯이 걸어. 오랜만에 보는 민역의 차를 익숙하게 올라타지. 그러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노래를 틀려고 해.
폰에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차의 스피커로 노래가 나와야 하는데 자기 폰 스피커로 노래가 나오는 거야. 블루투스가 꺼져있나 확인하는데 그거도 아니지. 왜 이러나 싶어 확인을 해보면 자기 폰이랑은 연결이 끊겨있어. 그리고 그때 훅 풍기는 바닐라 향의 진한 향수 냄새.
아, 여자친구분이 연결해놨구나. 순간 숨이 딱 멈추는 거.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었나 몸의 감각이 생생해져. 블루투스 하나 끊어진 게 뭐라고. 여자친구 있는 것도 알고, 여자친구 태우고 어딜 갔을 수도 있는 거고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오만 감정이 다 드는 거야. 머릿속이 엉망이지.
가방을 뒤져서 이어폰을 꺼내려다가 그것도 허무해져서 그만뒀다. 왜 이렇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이리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지. 자기는 형이랑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저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는데...
남들은 당연한 건데 자기는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형은 나를 싫어하나? 가족이 되고 싶지 않은 걸까? 창밖만 보는 유기연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오르는 거. 그렁그렁해서 눈 한번 깜박이면 후두둑 떨어질 눈물인데 유기연 그거 억지로 꾹 참아.
한 번씩 나오는 한숨소리와 허벅지 위에 놓인 꽉 쥔 주먹. 이민역은 뻔히 알면서 모른척하지. 유기연이 왜 저러는 건지, 왜 우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신경 안 쓰고 싶어. 어차피 여기서 그때 일을 꺼내봤자 자기가 애 입술만 빨고 싶지. 한 번 시작하면 얌전히 학교 보내 줄 생각 없잖아.
오랜만에 유기연 얼굴 보니 우습게도 자기 여자친구가 생각나는 거야. 얘도 그런 타입이지. 아닌가, 유기연이 좀 더 가여운가.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여전히 입술은 다 터서...
유기연 학교 앞, 항상 차 세우던 곳에 차를 세우면 유기연은 갔다 오겠다며 차에서 내리고는 했어. 그런데 애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고맙다고만 하고 마는 거. 이민역 잠시 걸어가는 유기연 뒷모습 바라봐. 애가 걸어가면서도 어찌나 인사를 많이 받는지 옆으로 점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잖아.
이민역은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어서 클락션 한 번 울리고 차에서 내려 유기연 부른다. 유기연 클락션 소리에 놀랐으면서도 바로 이민역한테 뛰어와. 이미 걸어간 거리가 꽤 되는데도 머뭇거림이 없지. 그거에 꽤 만족감이 드는 거. 이민역은 제 앞에 선 애 얼굴 보는데 차에서 울어서 눈이 빨간 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데 입술로 뭘 했는지 트고 찢어져있는 거. 자기 딴에는 연고를 바른 것 같은데 그게 너무 번들거려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기만 하잖아. - 형? 사실 이민역은 유기연한테 할 말이 없어. 그냥 자기 성질대로 한 거잖아. 유기연 볼 손가락으로 한 번 툭 쳐봐.
- 마치고 데리러 갈게. 유기연 방긋 웃으면서 알았다고 해. 열아홉 살 어린애 밤에 버스 하나 못 탈까 봐 걱정하던 시기가 얼마나 됐다고 애한테 이런 마음이 드나 싶어.
이제 점점 유기연이랑 어쩌고 싶은지 뚜렷해지잖아. 여자친구로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이, 저 어린 애새끼 행동 하나로 채워지는 거. 정상이 아닌데 그래도 알게 된 이상 피할 생각도 없어.
조퇴를 하고 병원을 가면 괜찮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기연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음. 입시를 치르는 애들이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기연은 좀 심한 편에 속했음. 이쯤 되면 예고는 실기연습이 한창이고 알게 모르게 기싸움이 한창인데 기연에게서는 묘하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아.
잘하는 애의 여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독기가 빠진 것 같은 거임. 한번 아파서 조퇴하고 나아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싶지. 항상 좋은 성적이었고, 수상 경력도 화려했고, 연습도 열심히 했는데 전만큼 못하다는 느낌이 계속... 담임은 그런 기연을 교무실로 불러서 힘든 것이 있냐 물어봐.
기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연습이 생각보다 잘 안된다는 얘기만 한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는 기연에 담임은 그저 알겠다고만 해.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 교무실을 나오는 기연은 표정이 싹 굳어지지. 아, 나 심각하구나.
그날 이후로 제대로 형을 본 적이 있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으니까 연습에 집중도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연습 시간만 길어지게 됨. 연습 시간이 길어지면 뭐 하냐고, 연습이 안 되는데. 잠도 잘 못 자고,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기연이 이러는 이유는 하나뿐이야.
이민역, 이민역과의 키스, 이민역의 여자친구. 온통 이민역.
형에게 여자친구가 있다. 이런 것만으로도 기연은 하루를 못 살게 되는 거. 심증? 진짜? 기연은 확신에 차있었음. 민역이 말하지 않았어도 기연은 그걸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늦게 들어온 형에게서, 세탁소에 맡길 형의 옷에서 생전 처음 맡아보는 바닐라 향이 났을 때.
형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 기연이 내뱉는 숨이 덜덜 떨렸음. 형에게서 나는 바닐라 향을 맡으면 유기연은 세상에서 제일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아. 형에게서만 나던 바닐라 향이 이제는 제 몸에도 밴 것 같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