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쌍커풀의 눈매가 순해 보여서 아무 탈도 없을 것 같은 사람. 이민역 여자랑 며칠 후에 애프터 하고, 몇 번 더 만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계 가지게 되고, 사귀게 되고. 안 그래도 바쁜 일정을 사는 사람인데 여자친구가 생기니 더 바빠지잖아.
이민역은 퇴근하면 여자친구 만나러 가기 바쁘지. 나이가 나이니까 빼는 것도 없어서 진도도 쉽게 나가잖아. 그러다 보니 여자 집에서 자는 날도 많아. 그러니까 이민역은 점점 유기연한테 소홀해지는 거. 애 학교 데려다주고 집으로 데려오고 하는 것도 이제 점점 손에서 놓게 된다.
여자랑 막 사귀었을 때 유기연한테만 연락했었어. 일이 바빠서 혼자 다녀야겠는데. 이렇게 문자를 보내면 한참 뒤에야 답장 와. 웅 이 답장 하나를 몇 분이나 보고 있고.
유기연은 이민역한테 저렇게 연락이 왔을 때, 한참을 고민했다. 왜? 왜 하필 그러고 나서? 근데 유기연이 어떻게 할 거야. 진짜 형이 바쁜 걸 수도 있는데 형한테 따져 물을 거냐고. 그냥 웅. 이런 답장만 보낼 수밖에 없었어.
유기연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해. 이민역이랑 키스한 거도 이민역이 여자친구가 생긴 것도. 그러면서도 일말의 희망은 놓지 않고 있었음. 본인이 형이랑 가족이라는 거. 그러니까 아침에도 여전히 방에서 나올 이민역을 기다리고, 학원 앞에서 혹시나 늦게라도 올 이민역을 기다려.
유기연은 그러다가 형이 안 오면 천천히 일어나서 집을 나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세상에 혼자 동떨어져서... 아무도 저를 찾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유기연은 익숙하게 버스에 올라타.
같은 가족이라도 부모님과 형제는 또 다르지. 부모님과는 다른 결로 의지가 되잖아. 그게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묶였다고 해도 말임. 유기연한테 형은 단순히 새로 생긴 가족이 아니었음.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은 희망이고, 없으면 안 되는 믿음이고,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말이야. 엄마 말고는 가족이 없어 외로움을 많이 탔던 기연에게 민역은... 민역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고 유기연 본인이 느끼는 것보다 더 무겁고 귀중한 것이었음.
그러니까 유기연은 이런 상황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되는 거. 대학과 가족, 친구 그런 고민들 사이에 가장 큰 건 역시... 당연하게도 가족. 입시라는 19년 인생 가장 큰 도전보다 유기연한테 더 중요한 건 이 가족이었음. 입시는 재수를 해도 된다. 그렇지만 가족은...
만약 자신과 민역의 사이가 틀어져서 그런 문제로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된다면? 외가 큰집에 내려가서 재혼한 남편이 이랬니 남편한테 딸린 아들이 기연이한테 그랬다느니 재혼했는데 이혼한 건 다 이유가 있다느니 그딴 소리는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음.
그렇다고 이 고민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유기연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부모님한테 가서 형이랑 키스했다고 말할 거냐고. 절대 못 하지. 그냥 혼자만 속으로 끙끙 앓는 거임.
이민역의 아빠가 민역이가 학교에 안 데려다주냐고 슬쩍 물어봤을 때 기연은 얼마나 떨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지. 그날은 방에 들어가 연습도 못 했다. 손이 자꾸 떨리니까 피아노를 칠 수가 없는 거.
자기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가슴 한가운데에 돌이 박혀서 빠지지도 않게 딱 걸린 느낌. 밥만 먹으면 구역질하기 바빴음. 매스꺼워서 음식이 넘어가지도 않아.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나오면 힘이 없어서 손만 덜덜 떨리지. 주먹 몇 번 쥐었다 펴고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멍하니 건반 위에 손가락만 올리고 있으면 계속 보지 못했던 이민역 생각이 그렇게 나지. 뭐가 되었든, 그냥 형이 보고 싶고... 또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아. 그때 왜 그랬어? 그리고, 물어보지 못할 자신을 너무 잘 알지.
기연은 성실히도 형을 기다렸음. 바쁜 아침 시간에 오지도 않을 형을 기다리는 이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기연이도 알아. 그렇지만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형을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그거라도 잘 하고 싶은 거지.
여전히 오지 않는 사람에 또 한 번 미련을 꾹꾹 쌓아두고 일어나.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자신과는 다르게 집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잖아.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걸어오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 - 어... 형 왔어? - 어. 학교는. - 지금 가려고. - 태워줘?
기연은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끄덕여. 그럼 이민역은 방향을 돌려 유기연과 같은 쪽으로 걸어가는 거. 기대도 안 했잖아. 이 기회를 놓칠세라 앞장서서 걷는 이민역 걸음에 맞춰서 거의 뛰듯이 걸어. 오랜만에 보는 민역의 차를 익숙하게 올라타지. 그러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노래를 틀려고 해.
폰에서 재생 버튼을 누르면 차의 스피커로 노래가 나와야 하는데 자기 폰 스피커로 노래가 나오는 거야. 블루투스가 꺼져있나 확인하는데 그거도 아니지. 왜 이러나 싶어 확인을 해보면 자기 폰이랑은 연결이 끊겨있어. 그리고 그때 훅 풍기는 바닐라 향의 진한 향수 냄새.
아, 여자친구분이 연결해놨구나. 순간 숨이 딱 멈추는 거.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었나 몸의 감각이 생생해져. 블루투스 하나 끊어진 게 뭐라고. 여자친구 있는 것도 알고, 여자친구 태우고 어딜 갔을 수도 있는 거고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오만 감정이 다 드는 거야. 머릿속이 엉망이지.
가방을 뒤져서 이어폰을 꺼내려다가 그것도 허무해져서 그만뒀다. 왜 이렇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이리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지. 자기는 형이랑 이렇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저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는데...
남들은 당연한 건데 자기는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형은 나를 싫어하나? 가족이 되고 싶지 않은 걸까? 창밖만 보는 유기연 눈에 점점 눈물이 차오르는 거. 그렁그렁해서 눈 한번 깜박이면 후두둑 떨어질 눈물인데 유기연 그거 억지로 꾹 참아.
한 번씩 나오는 한숨소리와 허벅지 위에 놓인 꽉 쥔 주먹. 이민역은 뻔히 알면서 모른척하지. 유기연이 왜 저러는 건지, 왜 우는 건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신경 안 쓰고 싶어. 어차피 여기서 그때 일을 꺼내봤자 자기가 애 입술만 빨고 싶지. 한 번 시작하면 얌전히 학교 보내 줄 생각 없잖아.
오랜만에 유기연 얼굴 보니 우습게도 자기 여자친구가 생각나는 거야. 얘도 그런 타입이지. 아닌가, 유기연이 좀 더 가여운가.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여전히 입술은 다 터서...
유기연 학교 앞, 항상 차 세우던 곳에 차를 세우면 유기연은 갔다 오겠다며 차에서 내리고는 했어. 그런데 애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고맙다고만 하고 마는 거. 이민역 잠시 걸어가는 유기연 뒷모습 바라봐. 애가 걸어가면서도 어찌나 인사를 많이 받는지 옆으로 점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잖아.
이민역은 그게 또 마음에 안 들어서 클락션 한 번 울리고 차에서 내려 유기연 부른다. 유기연 클락션 소리에 놀랐으면서도 바로 이민역한테 뛰어와. 이미 걸어간 거리가 꽤 되는데도 머뭇거림이 없지. 그거에 꽤 만족감이 드는 거. 이민역은 제 앞에 선 애 얼굴 보는데 차에서 울어서 눈이 빨간 거...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데 입술로 뭘 했는지 트고 찢어져있는 거. 자기 딴에는 연고를 바른 것 같은데 그게 너무 번들거려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들기만 하잖아. - 형? 사실 이민역은 유기연한테 할 말이 없어. 그냥 자기 성질대로 한 거잖아. 유기연 볼 손가락으로 한 번 툭 쳐봐.
- 마치고 데리러 갈게. 유기연 방긋 웃으면서 알았다고 해. 열아홉 살 어린애 밤에 버스 하나 못 탈까 봐 걱정하던 시기가 얼마나 됐다고 애한테 이런 마음이 드나 싶어.
이제 점점 유기연이랑 어쩌고 싶은지 뚜렷해지잖아. 여자친구로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이, 저 어린 애새끼 행동 하나로 채워지는 거. 정상이 아닌데 그래도 알게 된 이상 피할 생각도 없어.
조퇴를 하고 병원을 가면 괜찮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기연은 눈에 띄게 야위어갔음. 입시를 치르는 애들이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냐마는 기연은 좀 심한 편에 속했음. 이쯤 되면 예고는 실기연습이 한창이고 알게 모르게 기싸움이 한창인데 기연에게서는 묘하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아.
잘하는 애의 여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독기가 빠진 것 같은 거임. 한번 아파서 조퇴하고 나아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싶지. 항상 좋은 성적이었고, 수상 경력도 화려했고, 연습도 열심히 했는데 전만큼 못하다는 느낌이 계속... 담임은 그런 기연을 교무실로 불러서 힘든 것이 있냐 물어봐.
기연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연습이 생각보다 잘 안된다는 얘기만 한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는 기연에 담임은 그저 알겠다고만 해.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뒤돌아 교무실을 나오는 기연은 표정이 싹 굳어지지. 아, 나 심각하구나.
그날 이후로 제대로 형을 본 적이 있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으니까 연습에 집중도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연습 시간만 길어지게 됨. 연습 시간이 길어지면 뭐 하냐고, 연습이 안 되는데. 잠도 잘 못 자고,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기연이 이러는 이유는 하나뿐이야.
이민역, 이민역과의 키스, 이민역의 여자친구. 온통 이민역.
형에게 여자친구가 있다. 이런 것만으로도 기연은 하루를 못 살게 되는 거. 심증? 진짜? 기연은 확신에 차있었음. 민역이 말하지 않았어도 기연은 그걸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늦게 들어온 형에게서, 세탁소에 맡길 형의 옷에서 생전 처음 맡아보는 바닐라 향이 났을 때.
형에게 다른 사람이 있다. 기연이 내뱉는 숨이 덜덜 떨렸음. 형에게서 나는 바닐라 향을 맡으면 유기연은 세상에서 제일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아. 형에게서만 나던 바닐라 향이 이제는 제 몸에도 밴 것 같지.
유기연도 알아. 중요한 시기에 이러고 있는 거 자기한테 손해 가는 일인 거. 그럼에도 학원에서 연습을 하면 형의 얼굴만 생각이 나. 그러다 보니 눈 앞에 있는 악보에 집중을 못 해. 본인도 아는 걸 남에게 지적 받았을 때 얼마나 화나고 서럽냐고.
가족이 뭐라고, 이민역이 뭐라고.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나는 이것만 잘하면 돼. 속에도 없는 거짓말을 늘어놔. 괜찮다. 이를 악 물어. 정말 괜찮아야 하는데, 창문도 없는 작은 연습실 가득 바닐라 향이 나는 것만 같아.
그 순간 멀미하듯 핑 도는 눈앞과 뒤집어지는 속에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게 돼. 아, 안 돼. 한 번 올라온 구역질은 괜찮아질 생각을 안 하고... 먹은 게 없어서 우욱- 하고 소리만 나오는 거. 결국엔 제 성질 못 이기고 피아노 쾅 내려치지.
꼿꼿하던 자세가 무너지다가 다시금 허리를 똑바로 세워.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다시 건반 위로 올라가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기연은 또다시 무너진다. 그렇게 혼자 있는 연습실에서 엉엉 울어. 와중에도 기연은 입시곡을 치고 있고...
애가 엉엉 우는데 피아노 소리는 나니까 학원 선생님은 그냥 애가 입시 때문에 힘들어서 그러는 줄 알아. 유기연이 우는 이유는 다 이민역 하나밖에 없는데.
이민역이 유기연을 손 놓고 있던 동안, 유기연은 이렇게 살아. 매일을.
기연의 등 뒤로 차가운 콘크리트의 벽이 닿자 기연의 얼굴로 민역의 큰 손이 올라와. 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민역의 목에 팔을 감지. 입술이 겹쳐지고 민역의 혀가 제 입안으로 들어오고 기연의 몸을 만지는 큰 손에 기연은 민역에게 몸을 더 밀착시키며 매달려.
입술이 깨물리고 혀가 섞이고... 그러다가 입술이 잠시 떨어져, 다시 깊게 파고들지. 낯선 행위에 기연이 적응을 못하고 민역을 밀어내려는데 민역은 오히려 기연의 허리에 팔을 감고 몸을 바싹 당겨와. 민역의 손이 기연의 하복 안으로 들어왔을 때,
기연은 파드득 놀라며 깨어났음. 교실이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파서 보건실에 와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고작 꿈이었는데도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 제 볼을 감싸던 손, 뒷목을 아플 정도로 꽉 잡던 거, 손바닥으로 느껴지던 형의 몸, 그리고 닿아오던...
자기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형한테 미안하다는 생각. 아, 너무 무섭고... 그럼에도 좋아서... 기연은 또 울게 되는 거.
기연은 오랜만에 학원 앞에서 민역의 차를 봐. 항상 오던 때에는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없는 게 더 익숙하지. 안 오던 것보다 이민역이 자신을 데리러 오던 때가 더 긴데 참 이상하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 다는 게 이런 건가. 경험하지 못해 잘 모르던 말을 이제야 이해하지.
기연이 익숙하게 차에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매면 민역은 아무 말도 없이 시동을 걸어.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얘기들이 없으니 차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해. 기연이 틀던 노래들은 둘 사이에 이런 정적을 만들지는 않았잖아.
그렇게 적막한 차 안에 유기연의 카톡 알림 소리만 울리는 거. 유기연 허벅지 위에 있는 폰은 쉴 새 없이 진동소리가 나지. 계속 그러니까 유기연은 차에 타고난 후로 지금까지 폰만 보고있고, 이민역은 앞만 보고 운전만 해.
단톡방에 올라오는 말들을 보던 기연은 문득 고개를 들어 민역을 봐. 민역은 입술과 턱 그 즈음을 매만지고 있었음. 턱과 목, 셔츠를 걷은 형의 팔뚝과 손목. 그걸 본 유기연의 머릿속은 엉망이야. 꿈속에서 본인을 벽으로 몰아세우던 형, 허리를 꽉 껴안던 형의 손이 옷 안으로 들어오는 거.
그게 뭔지 기연도 너무 잘 알고 있잖아. 그날 내가 형에게 매달렸다면, 안 그럼 형이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나는 그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형이랑... 거기까지만 생각했음에도 기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지.
이때까지 그렇게 가족이라고 해놓고 생각한다는 게 이런 거라 마음이 쿵 떨어져. 말로 꺼내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생각들이지만 기연은 그거마저도 견딜 수가 없는 거.
그런 꿈도 꾸고, 그런 생각도 하고 사실 형이랑 가족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아닐까? 내가, 내가... 아니, 나는 형이랑 가족이고 싶은데. 가족이어야만 하는데.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에 기연은 당연하게도 본인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음. 가족과 가족이 아닌 타인. 이 두개로 나뉘어 확신할 수 있다면 편할 텐데 기연은 지금 자신이 민역의 가족도, 가족이 아닌 타인도 아닌 것 같았음. 그래서 기연은 이도 저도 아닌 제 자리를 확고이 하고 싶기도 했어.
"형, 나 형 여자친구 소개시켜주면 안 돼?"
아, 이렇게 나온다고.
유기연이 어떤 상태인지는 이민역도 알고 있어. 애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고 자기만 보면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애가 이상한 죄책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이민역은 그거에 맞장구쳐줄 생각은 없어.
이민역은 처음부터 유기연이랑 가족이라는 생각을 안 해봤다. 그리고 그게 그리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 생각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애 허벅지 잡아 벌리고 싶다는 마음은 안 들겠지.
"안 돼." 웃기게도 지금 이민역의 우선순위는 여자친구보다 유기연이었음. 처음부터 여자친구는 유기연 대신이었잖아. 그런 애를 굳이 여자친구 앞에 끌어다 놓을 생각은 없다.
이제는 여자친구를 만나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지. 유기연밖에 안 되는 건데 다른 거에 시간 쓰고 싶지 않아. 그런데 애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딴 말을 다 하고. 민역은 핸들을 툭, 툭 건드려. 애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 이딴 거라 기분이 좋지는 않아.
소개해달라고 말 꺼낸 유기연이라고 형 여자친구를 소개받고 싶겠냐고. 형한테 여자친구 생겼다는 사실 하나로도 힘들어하던 애가 굳이 여자친구를 소개해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였음. 그렇게 소개를 받으면 이민역이랑 진짜 가족이 되는 것 같아서.
여자친구를 소개받고 자신을 형의 동생이라고 소개하면 형의 여자친구는 자신을 형의 가족이라고 생각할 거니까. 그래서 기연은 형이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기를 원했다. 소개를 받음으로서 형이 자신에게 했던 것도, 제가 형에게 들었던 그런 마음이 잊혀질 것 같기도 했음.
그러니까 안 된다는 형의 말은 예상한 것이었음에도 서운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심하기도 해. 여자친구 소개받는 상상도 안 해봤잖아.
기연은 곰곰이 생각해 봤음. 형의 여자친구... 아... 순간적으로 찢어질 듯 아픈 속과 코끝에 훅 맴도는 바닐라 향이 현재 기연의 위치를 말해주는 듯해. 이도 저도 아닌...
형은 여자친구한테도 그럴까. 나한테 했던 것처럼... 큰 손으로 감싸 쥐던 볼과 자꾸만 스치던 형의 앞머리, 입안으로 들어오던 혀과 맴돌던 비릿한 피 맛, 숨도 못 쉬고 형을 밀어내던 본인. 그때의 감각... 느낌...
"내일도 데리러 와주면 안 돼?" 민역은 딱 한마디 했어. 어. 기연은 그 무관심한 대답조차 기다리고 있었잖아. 주차를 했음에도 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민역에 기연은 느릿느릿 가방을 챙겨. 힐끔, 민역을 한 번 쳐다보면 업무 메일을 보고 있는 건지 차트가 가득한 화면이 보여.
관심이 가는 것도 잠시, 기연은 조용히 혼자 집에 들어가려 문 손잡이를 잡지. 그리고 탈 때는 보지 못했던 걸 보잖아. 손잡이 바로 밑 수납공간의 검은색의 네모난 것. 그리고 그 옆의 손바닥만한 작은 박스. 기연은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 자기가 잡은 건 립스틱이랑 콘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