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August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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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소거에 가깝던 소리가 점점 커지니 졍아는 김셕즨의 목소리를 알아챘지. 비척비척 걸어온 졍아가 졍국 옆에 풀썩 앉더니, 아무렇지 않게 드라마를 본다. -아빠 셕즨아저씨 보고 싶어? -어? 아니? 그냥 우연히 본 거야. 안 졸려서 TV 켰다가… -거짓말. 졍국이 아니라고 잡아떼도 졍아는 못 속여.

-나는 어제 유치원 안 가서 친구들 보고 싶었어. 같이 물고기잡기 놀이도 하고 싶구, 미끄럼틀도 타구 싶어. -… -그리고 내가 유치원 가면 친구들이 나한테 보고 싶었다구 해줬으면 좋겠어. 나 없어서 심심했다구. -… -그 말이 화나는 말은 아니잖아. 그치?

-…졍아야 그러면 아빠가 셕즨아저씨한테 보고싶었다고 말했는데… 아저씨는 아빠 안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아저씨가? 아저씨는 그런 말 안 해. -정말? 졍아가 어떻게 알아? -음… 왠지 그럴 것 같아.

김셕즨이 졍아한테 정말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느낀 졍국이야. 아이한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리구 아빠, 보고 싶었다는 말이랑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거, 마음 속에만 있는 말은 직접 들려주지 않으면 모르는 거랬어. 엄마가. -엄마가?

-웅. 그러니까 아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근데 아빠가 셕즨아저씨를 보고싶어해도 될까…? -누구를 보고싶어하는 일은, 나도 아빠도 셕즨아저씨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마음이야. -…그렇구나. 졍아는 똑똑하네. 아빠보다.

졍국은 자다 깬 졍아한테서 이 상황의 정답을 들었다. 보고싶은 마음,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맘속에만 있는 말은 안 하면 아무도 모른다는 것. 마지막으로, 김셕즨은 졍국을 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말 마지막으로, 졍국은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것.

졍국은 졍아를 재우고, 꺼놨던 핸드폰을 다시 켜. 늦은 새벽인데도 몇 분 전에 보낸 김셕즨의 문자. [연락 기다릴게. 아무때나 해도 돼.] 졍국은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고 전화 버튼을 누른다.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어서. 그저, 알아주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서서.

오래 들릴 것 같던 연결음은 금세 끊기고, 김셕즨의 목소리가 들려. -여보세요? 졍국이 맞지? -…내 번호 벌써 잊었어요? -아니.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근데 전화해준 게 안 믿기고, 너무 좋아서… -… -아, 부정 기사 낸 거, 네가 오해할 것 같아서 꼭 직접 말하고 싶었어… -…

-지금까지 보낸 시간, 내 마음대로 부정하는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이상하더라. 그래서 문자로 보내놓기는 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어. 또… 이대로 끝일까 봐. -… -무서웠어, 많이.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너한테 또 상처만 줬구나 싶어서.

무서웠다는 김셕즨의 말에 졍국은 적잖이 놀랐어. 그리고 졍국이 전화를 끊을까 봐 마음이 조급해진 김셕즨은 담아뒀던 말을 계속 뱉어낸다. -배우 된 게, 후회됐어. 나 때문에 너랑 졍아한테 상처만 주고… -왜 후회해요. 형 꿈이었잖아. -배우 돼서 너한테 상처 주는 게 내 꿈은 아니었어.

-그래도 내가 있으면…형이 힘들어지잖아. -졍국아, 나는 네가 없는 꿈은 안 꿔. 그래서 그냥… 나 연예인 같은 거 하지 말고, 네 옆에만 있고 싶어… 나는 연기 안하고는 살 수 있는데, 너 없이는 못 살아.

-형 우리 몇 년 전에 헤어진 거 기억하죠? -…나 차인 거야? -들어봐요, 계속. -응… -그때 사실 내가 도망친 거야. 내가 형의 짐이 되면, 형이 날 싫어할까 봐. 아니면 형이랑 나랑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서로 소홀해지면, 내가 외로워질까 봐. 걱정부터 앞서서 미리 도망쳤어요.

-…이번에도 도망칠 거야? -그러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이렇게 또 잊으면 되겠지,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지, 생각했거든. 근데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도망 안 치고 싶어졌어요. 형이 나 안 싫어했으면 좋겠고, 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 -형은 나 안 싫어할 거잖아. 외롭게 안 할 거잖아.

-당연한 걸 이제 깨달았어? 그건 좀 서운한데. -그러니까. 이제 도망 안 친다고. -그럼 내가 너 도망 못 가게 꼭 잡고 있을게. 아니, 도망가려는 생각도 못하게 꼭 안고 있을게. 네가 도망가면… 나는 살지를 못해. -근데 있잖아. -응? -백수는 안 돼.

-…돈 못 버는 애인은 싫어? -네. 내 꿈에 연기 안 하는 김셕즨은 없거든요. 이제야 얼굴에 진짜 미소가 퍼지는 김셕즨. 가라앉았던 목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지. -졍국아, 내가 많이 좋아해. 목소리 듣고 싶었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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