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이번 타겟이라고 전해져온 편지에서 메모리카드 빼서 확인해보는데, 인적사항이고 뭐고 하나도 안적혀있고 사진만 달랑 들어있어. 어차피 얼굴만 봐도 다 아는 배우니까. 옴이 좋아하는 여자고.
-연예인이 이러고 있어도 돼요? 아무리 외국이래도. -….오랜만이다? 출소는 언제? -오래됐어요. 링링 상 받았을때 이미 나와있었어. -그렇구나. 난 쉬러왔는데. 혹시 복수하러 왔어? -오늘은 링링이랑 데이트 하러 왔어요. -뒤집어 씌워서 감옥까지 보낸 내가 뭐가 예쁘다고. -일단 입술이 예쁘고요?
[너 대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옴. 클라이언트는 하루 빨리 처리해달라고 난린데.] -일주일만 달라고 했을텐데. 이미 그쪽에서 원하는 파일은 보냈고. [확실히 해주길 바란다고. 네가 굳이 접근해서 친한척할 이유가 없어.] -난 있어요. 그리고 이게 내 마지막 임무예요. [뭐? 너 설마…]
-내가 밉지 않아? -하나도 안 밉고 일단 입술이 예쁘다니까 -난 네가 미운데. 내 약점을 속속들이 아는 네가 너무 싫어. -잘하고 있어요. 날 미워하는 게 링링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죽이러 왔으면서. -오늘은 하던 거 마저 해요. 옴은 자꾸 미련이 생겨. 링과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는.
쉽게들 개천에서 용났다고 하지. 두 사람이 자란 곳은 개천씩이나 되지도 못하는 시외의 축축한 판자촌. 그마저도 개발구역이 되고부턴 깡패들만 심심찮게 눈독을 들이며 돌아다녔고 밤까지 연기학원에 있다 오는 링을 늘 기다리던 옴. -너 이제 나오지 말라고. -이거. -성적표는 왜. -일등..하라며.
판자 하나 차이로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어린 옴의 동생을 챙기고, 아픈 할머니를 챙겼던 링은 곧 옴의 세상이었으니까. 링이 하라면 다 할 거였어. -그래. 잘했어. 너희집 망하기 전까진 부모님 둘다 높은 군인이었다며. 너도 성공해서 얼른 이동네 떠. -… -맞다. 너희 집은 너때문에 망했댔지?
블랙요원이었던 부모의 집에 쳐들어온 괴한들. 어린 옴을 숨기다가 대신 죽은 엄마.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다가 사고로 죽은 아버지. 나라는 블랙이었던 그들을 외면했고, 부모 잡아먹은 괴물이 된채로 내던져진 이 동네에서 링은 딱 하나 남은 온기 같았는데.
그런 링이 집에 들어 온 빚쟁이를 방어하다가 찔렀고, 옴이 링을 지키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지. 이제 막 큰 영화 오디션 합격전화를 받은 링보다는 옴이 그 죄를 뒤집어 쓰는 게 맞아 보였어. 옴이 받은 명문 대학교 합격증은 그냥 종이쪼가리 였으니까. 링을 밝은 곳에 올려둬야지 링을 사랑하니까.
-한두달은 면회라도 갔지 바빠지자마자 널 모르는 척 했어. 귀찮아서도 아니고 그냥 널 보는 게 불편해서. 네가 그동네에서 끔찍했던 내 과거 같아서. -미안해서 그랬을 거야 당신은. -… -죄악감은 쉽게 증오의 얼굴로 돌아서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여달라고 옴을 찾아와. 이제 그정도 이치는 알아.
동생이 자립할 때까지 옴의 집에 돈을 보내줬다는 링이야. 그 소식을 알고 옴은 절대 링을 찾아가지 않았고 -우리 구질구질했던 시절 적당히 모른척 하니까 이런데서 너랑 둘이 노는 게 된다? 이게 돼. 행복이 된다. 남들은 다 이러고 사나? 억울하네. -지들만 이러고 산 것들 죽여줄까? -직업병이니.
타겟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게 룰이었지만 시간을 벌기위해 링이 갖고 있다는 파일을 빼돌리면서 알았지. 링이 갖고 있던 건 총리 정도는 모가지를 날릴 수도 있는 정치인들과 배우들의 섹스스캔들 자료. -파리엔 왜 왔어? -쉬러 왔다니까. -목숨 걸고? 뭔가 아는 듯한 옴의 말에
링은 멈칫하다가 -기지배 기지배 거리잖아. 열받게. 그래서 홧김에 나도 열좀 받게 했지. -…성질머리 하고는. -그러니까 그냥 죽여. -…. 앞서 가던 링이 웃으며 다리 위에 앉아. -어차피 난 죽어. 네가 아니어도 누군가의 손에. -난 아프게 죽여. -상관 없어. 너정도면 안 억울할 것 같아서 그래.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걸까.. 옴은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서 살만 했는데,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던 링은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 아침이 먹고 싶다던 링을 위해 마켓에 나온 옴은 과일을 사면서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이에게서 작은 꽃을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누가 따라온다
날이 새도록 옴이 돌아오지 않자 링은 슬리퍼 차림으로 온 시내를 다 돌아다녀. 집 가까운 곳에 쏟아져 있던 장바구니와 꽃이 옴이 놓친 무언가 같았어서. -링링..? 골목 한복판에 서서 울먹이는 링에게 다가오는 옴. -너 뭐야! 너 대체 뭐야!! 옴의 옷을 잡고 흔드는 링의 거친 손길을 다 맞아줘.
-왜 밖에 나와있어. -찾았잖아! 너 죽는 줄 알고 찾았잖아! 죽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다던 링이 자기 일에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울부짖는 걸 보는 옴의 마음은 착잡해져가고, 피묻은 손을 뒤로 숨겨 -약속해. 네가 나보다 먼저는 못 죽어. -… -약속 안하면 난 지금 널 떠나. 그러니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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