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헤어진 애인 잘 살고 있나 몰래 보러 온 배우 김셕즨 재질... 멀리서 졍국이 얼굴 확인만 하고 매니저한테 가자고 하겠지. #진국
졍국이랑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몇 년째 김셕즨만 미련 그득한 거 옆에서 지켜보는 매니저만 가슴 타들어가지. 졍국이는 김셕즨이랑 헤어진 지 1년만에 결혼했고 아내는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어. 결혼 전에 아내가 데려온 딸 키우면서 싱글대디로 살고 있는 졍국이었다.
졍국은 김셕즨이 무명 배우일 때 연애 시작했는데, 김셕즨의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고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앞길 창창한 배우한테 내가 짐이 되는 건 아닐까. 혹시라도 나중에 오랜 연인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형에게 난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거기에 남자이기까지 하면 타격은 더 크지 않을까. 졍국은 그런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니까. 그렇게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헤어지자고 했어. 김셕즨의 스캔들이 터진 날. -나는 형이랑 사귈 그릇이 못되나 봐.
당연히 그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었지. 어떻게든 관심을 얻을 기사 내보겠다는 기자들이 반쯤은 꾸며서 내보낸 거니까. 졍국도 알아. 아는데, 그냥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형 연기 하고 싶어했잖아. 우리 서로한테 이 관계는 독이 될 지도 몰라. 여기서 끝내는 게 나아.
짐이 되기 싫어서 떠나겠다는 말. 그리고 김셕즨은 졍국을 붙잡지 못했어. 앞으로 크고 작은 스캔들은 자주 날 거고, 만날 시간은 계속 줄어들 거고, 사귀어도 사귀는 것 같지 않을 수도 있어.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김셕즨. -미안해, 국아. 자기는 힘들어도 되는데, 졍국은 안 된다고 생각해서.
김셕즨과 이별한 졍국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 이십대의 끝자락에 걸쳐있으니 선 안 보겠다는 말도 더는 못할 것 같아서 선도 몇 번 봤고, 김셕즨을 잊고 싶어서 괜찮은 사람과 만나보기도 했어. 그렇게 결혼했고 졍국의 가정은 둘이 아닌 셋부터 시작했다.
아내는 지병이 있었고, 졍국에게 염치없지만 아이의 가족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어. 그래서 졍국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와 단 둘이 살게 된 거야. 졍국은 오히려 잘 됐다 싶었지. 평생 김셕즨 그리워하면서 살 바에야 아이랑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게 낫겠다고.
김셕즨은 졍국이 결혼한 것만 알고 있었고, 가끔씩 졍국의 집 앞에서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가길 계속했어. 못할 짓인 거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안하면 자기가 못 살 것 같았거든. 오늘도 모자에 마스크까지 하고 나와서 다섯 살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와 졍국이 집에 들어가는 걸 봤어.
김셕즨은 졍국에게 딸이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조금 더 지켜봤어. 쟨 누구지. 적어도 다섯 살이면 결혼하고 나서 생긴 아이라는 건 말이 안 돼. 혼자 깊이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 저 사람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야! 들켰다. 어린 애가 예리했다.
김셕즨은 놀라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버렸어. 그냥 차 끌고 나올 걸.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 여기 왜 있어. 졍아가 잘못 본 거겠지. -아니야! 예전에 엄마랑 같이 티비 볼 때 봤다니깐! 애 이름이 졍아인가 보다. 김셕즨은 조용히 골목 쪽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들켰어.
총총 뛰어오는 졍아는 자기 말이 맞다면서 졍국에게 이리 와보라고 해. 졍아야, 아무리 그래도... 김셕즨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못 들었어. 졍국이가 분명 화 낼 거야. -뭐예요...? 아무리 모자랑 마스크로 가렸어도,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연인이었는데 잊을 리가 있나. 김셕즨을.
김셕즨 결국 일어나서 졍국이 눈도 잘 못 마주치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아저씨 우리 아빠 알아요? 역시 어린 애는 예리했다. 둘 다 정적에 휩싸여 있다가 졍국이 입을 열어. -아니. 아저씨는 아빠 몰라. 아저씨는 연예인이고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졍국은 졍아 손을 잡고 집에 들어가자고 해보지만, 연예인을 제 앞에서 처음 보는 건데 아빠 말이 어떻게 귀에 들리겠어. 그리고 김셕즨도 그런 졍국을 슬쩍 붙잡아. 손은 못 대고, 말로. -저 모르세요? 저 티비에 자주 나오는데... -...제가 티비를 잘 안 봐서요.
졍아도 덧붙여. 아빠는 티비로 뉴스만 봐요. 딴 건 안 봐요. -저 뉴스에도 몇 번 나왔는데. -... -진짜 나 몰라요? 진짜로...?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못하는 김셕즨. 자기를 안다고, 아니 이름은 들어본 적 있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젼졍국한테.
-몰라요. -... -나는 당신 몰라요. 들어가자, 졍아야. 꼭 잡은 아이 손을 잡아끄는데, 발은 잘 안 떨어져. 몰래 집앞에 찾아온 김셕즨한테 화가 난 건지, 오랜만에 본 옛 연인이 반갑기라도 한 건지 알 수는 없어. -아가야, 아저씨랑 사진 찍을래? 원래 연예인 만나면 같이 사진 찍는 거야.
원래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김셕즨 옆에 딱 붙어서 아빠 졍국을 바라봤어. 아빠 사진 찍어줘! 졍국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아저씨, 내 이름 졍아예요. 젼졍아. -그래, 졍아. 예쁘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셕즨을 보고 나서야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순진한 아이는 제 이름을 알려주고는 제 아빠의 이름까지 알려줘. 참 엉뚱하고도 단순했지. -우리 아빠는 졍국이에요. 젼졍국. -...그래, 젼졍국. 졍국의 이름을 아이한테 들으니까 괜히 슬퍼져. 엄청나게 멀어진 사람 같아서. -졍아야, 아빠 이름을 그렇게... -아빠 빨리 사진! 하나둘셋, 찰칵.
김셕즨은 졍아와 사진을 찍어주고는 가봐야겠다면서 모자를 다시 푹 눌러 써. 졍아는 김셕즨에게 손까지 흔들어주고 순순히 집으로 들어왔어. -아빠, 저 아저씨 진짜 잘 생겼어. 그치! -응. 잘 생겼지. 그렇게 좋아했던 얼굴인데.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못나 보일 리가.
-목소리도 진짜 좋아, 그치! -좋지. 듣기만 해도 좋던 목소리. 저 목소리로 매일 사랑한다고 해 줬었지. 다시 듣고 싶었는데. -이제 다시는 못 보겠지? -... 못 보겠지. 안 볼 거고. -아쉽다... -티비에서 보면 되지. 아저씨는 졍아 못 보러 와도, 졍아는 아저씨 볼 수 있어.
일부러 김셕즨 안 보려고 드라마나 영화도 안 보고, 연예 기사는 관심도 안 가지던 졍국이었어. 졍국은 그렇게 안 보려고 기를 썼는데, 김셕즨은 졍국을 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셈이지. -졍아 손 씻구 와. -우웅. 졍국도 몰래 김셕즨을 봤다. 아까 찍은 사진으로.
자신의 딸과 옛 연인이 같이 나온 사진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예전에는 핸드폰 갤러리의 절반이 김셕즨의 사진이었는데, 지금은 방금 찍은 이 사진이 전부야. -잘 못 지냈나 보네. 김셕즨은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자꾸 울상 짓는 표정이 보였어. 졍국의 눈에는.
모자를 써서 그늘진 김셕즨의 얼굴을 확대해서 찬찬히 보고 있으면, 졍아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제 옆에 앉아. -나두 사진 볼래. 졍국은 놀라서 핸드폰 화면을 꺼 버려. 어어, 간식 먹으면서 볼까? 졍국이 부엌에서 젤리 한 봉지를 꺼내러 가면 졍아도 그 뒤를 도도도 쫒아가.
졍아가 좋아하는 복숭아맛 젤리를 입에 넣어주고, 핸드폰을 다시 켜서 사진을 보여줘. 그러면 졍아도 졍국이 그랬던 것처럼 김셕즨의 얼굴을 확대해서 봐. 그 쪼끄만 손으로. -그렇게 그 아저씨가 잘 생겼어? -우웅. 졍국은 괜히 우중충해진 제 기분을 달래려고 아빠보다도 잘생겼냐고 물어봐.
-음 쪼끔? 졍아가 제 손가락으로 쪼끄만 원을 만들어서 이만큼만 잘생겼다고 하면, 졍국은 픽 웃어. -진짜? 쩌번에는 아빠가 제일 잘생겼다면서. -아빠가 쩨일 잘생겼는데, 이 아저씨가 쪼끔 더 잘생겼어. 아빠가 더 잘생겼다고 해줄 법도 한데 거짓말은 못하는 건지, 김셕즨이 더 잘생겼단다.
김셕즨과 졍아가 사진을 찍은 날 이후로는 김셕즨을 볼 수 없었어. 졍아는 김셕즨을 또 보고 싶은지 하원할 때마다 집 앞에서 두리번거렸지. 오늘은 왔나 하고. -아빠 이제 그 아저씨 안 와? -연예인 아저씨?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눈도 초롱초롱한 걸 보니 또 보고 싶은 게 맞나 봐.
-그 아저씨 많이 바쁜가 봐. 티비 나오는 사람은 엄청 바쁘대. -그래두... 졍아 보고 싶어서 또 올 수도 있잖아! -아저씨도 졍아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아저씨한테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못 오나 봐. 꽤 실망한 아이 손을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졍국. 못 오겠지. 안 오겠지.
그런 하루하루가 계속되는데, 졍국도 속으로는 '김셕즨은 안 올 거야'하면서 기대하긴 할 거야. 몇 년간 안 보다가 딱 한 번 봤다고 그리움이 몇십 배는 커졌어. 졍국은 그런 마음을 잘 억누르고 살아왔는데, 무뎌질 때쯤 제 얼굴은 비춘 거지, 김셕즨이. 사실 김셕즨은 지금까지 몰래 보러왔지만.
졍아를 재우고 나서 졍국은 밤에 하는 시사 프로그램만 주구장창 보다가 잤어. 그런데 오늘은 김셕즨이 너무 보고 싶은 거다. 졍아랑 찍은 사진을 보다가 결국 김셕즨이 나온 드라마를 딱 한 편만 보고 자기로 해. -그렇게 참았던 게 오늘 무너지네. 미련하다, 나도. 미련하게 미련은 아직 남아서.
2년 전에 종영한 드라마. 아마도 졍국과 헤어진 후에 촬영한 거였겠지. 장르는 로맨스 코미디. -이 형은 나랑 헤어지고 나서 어떻게 이런 걸 찍었어... 잘된 드라마라더니 확실히 재미있긴 해. 그런데 졍국은 자꾸만 슬퍼지는 거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울컥하지.
티비 속 김셕즨은 분명 웃고 있는데, 졍국은 그게 너무 슬퍼. 결국 로코 드라마를 보면서 졍국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여전히 이유는 모르고. -아빠...울어...? 언제 깬 건지 졍국의 옆에 와서 앉은 졍아였어. 여섯 살 아이가 보기에, 로코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졍국은 정말 이상해 보였을 거야.
